아래는 기획회의의 브레인스토밍을 거친 후 그 내용을 토대로  20대 중반인 시인 한호진이 쓴 글이다.
작가들은 직,간접적으로 이 글의 줄거리를 공유하고 참조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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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진의 글작업
"추억의 향기(香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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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마신다. 마치 오늘 아침은 어제와는 다르다는 듯이 햇빛, 바람, 나뭇잎의 냄새는 한 번도 같은 적이 없다.

꿈을 꾸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어둠의 세상에서 갑자기 빠져나오게 된 순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빛과 함께 차고 싸아 한 것이 코를 통해 허파로 마구 밀려든다. 낯설다. 당황스럽다. 울음이 터진다. 하지만 곧 익숙한 그 무엇이 공기 속에 섞여 있음을 안다. 뭘까. 엄마의 익숙한 그 품에 안기고 나서야 나는 다시 안전하다고 느낀다. 세상에 나와서 제일 처음, 우리는 코로 숨을 쉰다.

커피를 내리고 토스트로 대충 아침을 때운다. 갓 지은 쌀밥에 구수한 된장찌개가 보글거리는 식탁이 그립다. 왜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을 수 있을 때는 그게 사치가 될 줄 몰랐을까...욕실에 들어가 박하맛이 나는 치약을 칫솔을 짜서 물고 생각한다. 재개발 구역이 되면서 이사를 가게 생겼는데 오래된 집이라 구석에 쌓아둔 물건들이 많다. 박스 하나를 열면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시간여행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당장 쫓겨나는 것도 아니고.

안방에는 낡고 삐걱거리는 장롱 같은 옛날 물건들이 많다. 그 방에 들어가면 아스라한 졸음 속에 녹아드는 기분이다. 냄새와 기억의 미지근한 공기 안에서 천천히 헤엄치며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집 안에서 온종일이라도 놀 수 있었던 때, 우리 집은 아주 크고 넓은 냄새의 세상이었다. 장독대와 빨래가 나란히 있던 베란다, 숨바꼭질을 하다 잠들어버리기 딱 좋은 옷장, 엄마의 화장대. 화장을 하는 엄마를 나는 좋아했다. 아니, 싫어했다. 향긋함에는 왠지 모를 불안함이 스며있다. 이마에 눈썹을 그리고, 뽀뽀를 해주고 엄마는 하루치의 기다림을 놓고 다녀온다.

내 이름이 쓰인 노랗게 변한 라면박스를 찾았다. 초등학교 때 쓴 교환일기장이며 공깃돌, 색연필, 학을 접어 넣은 유리병이 있었다. 향기 나는 물건들은 희미하지만 아직도 그 향기를 갖고 있었다. 보라색에서는 포도향이 주황색에서는 오렌지향이...그 아이에게서는 무슨 향기가 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아이 집은 다른 냄새가 났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햇볕이 잘 드는, 현관을 열었을 때 아무도 없어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엄마가 있는 집. 그 집의 냄새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 애가 이사를 가고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 앞을 지나며 한 동안 나는 초인종을 눌렀던 기억이 난다. 현관문이 열리기를, 그래서 따뜻한 그 냄새를 다시 한 번 더 맡게 되길 바라면서.

붙박이장을 열었는데 스커트가 툭 떨어졌다. '교복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거야? 그것도 세탁까지 말끔히 해서는...'

깨끗하게 빨아서 다린 셔츠와 스커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는 수험생의 월요일 아침, 울적한 기분을 달래주었다. 마치 매일 똑같은 등굣길에도 기대감을 불어넣어주는 수학선생님의 향수냄새처럼 그것은 소소한 일상의 기쁨이고 설렘이었다.

사회에 나오고 나서야 알았다. 난생 처음 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향기가 날 수 있다는 것을. 후각에 대한 시각의 명백한 배신이자 비밀스럽게 간직했던 내 추억을 빼앗겨버린 느낌. 문득 생각했다. 세상의 수많은 향기 중에 어떤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따라 그것은 그 사람만의 향이 되는 거라고. 아이가 말문이 터지듯 자기만의 세상에 눈을 뜨는 것이며, 곧 향을 깨치는 것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 향수 냄새가 나든지 나에게 그 향기는 이미 수학선생님 냄새인 것처럼.

향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의 호기심은 시향이나 향 수집 같은 취미에 그치지 않고 조향공부에까지 미쳤다. 조향사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내 느낌을 담은 향을 직접 만들어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책상 위에 놓인 작고 네모난 스프레이 병. 친구가 운영하는 소규모의 조향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처음 완성한 향수다. 나에게 삼촌을 되찾아 준 향수, <노스텔지어>.

‘추억의 향기’라는 테마를 가지고 나만의 향수를 만들어 보려고 좋아하는 향기들을 섞었다. 겨울에 동생들하고 뜨끈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게임하고 책보고 수다도 떨고 있으면 바가지에 한 가득 담아와 나눠 먹던 상큼한 귤 냄새와 내가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엄마한테서 풍기는 은은한 화장품 냄새. 그것만 있으면 나의 추억의 향기가 완성될 거라 생각했는데...왠일 인지 영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이게 아니잖아. 이상하다. 이건 분명히 훨씬 더 좋은 향기여야 하는데...뭐가 부족한 거지?’

“탑과 베이스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 네가 쓴 아이디어 노트를 보니까 이 향이 어울릴 거 같은데 어때?”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때 조향사친구가 와서 권하는 것이 ‘담배’ 향.

“아니, 이렇게 좋은 향에 왜 담배 같은 걸 넣어서 엉망을 만들어? 싫어.”


친구는 웃으며

“너 담배가 싫구나? 아버지가 담배 피우셔?”


“아니...... 삼촌이.”

삼촌 방은 늘 담배냄새가 진동했다. 엄마가 아무리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해도 워낙 방 전체에 냄새가 가시지 않아 세를 내놓기 위해선 벽지를 전부 뜯고 새로 발라야 했다. 서울에 취직을 하면서 우리집에 샛방살이를 하게 된 그 사람은 우리 집안에 먼 친척이 되는데 엄마는 그냥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주섭 삼촌은 학원에서 문학을 가르쳤다.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입시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방에 처박혀서 줄곧 담배를 피웠다. 책상 앞에서 불을 밝히고 연기 속에서 뭔가를 끊임없이 쓰고 또 쓰고. 나는 삼촌이 웃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마에는 주름이 패어있어 가뜩이나 어두운 얼굴에 그늘을 더 했다. 무엇보다 삼촌의 역한 담배냄새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었다. ‘도대체 얹혀사는 주제에 어떻게 저런 민폐를 끼칠 수가 있어?’ 가뜩이나 사춘기라 더욱 예민했던 나는 '삼촌이 방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아니 아예 우리 집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부모님에게 호되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그런 내 말을 삼촌은 들었던 걸까. 그 날 이후로 삼촌은 나와 거의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들어오는데 삼촌이 대문 옆 골목에서 슬리퍼 바람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모른 척 하고 들어가려했는데 갑자기 삼촌이 불러 새웠다.

“지원아... 담배냄새가 싫지? 미안하다.....하지만 이 녀석은 나한테 애인보다 더 소중한 친구야.”

“담배가 뭐가 친구라는 거에요? 담배 피우다가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그리고 나서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담배 따위가 무슨 친구라는 거야...'

어느 추운 겨울, 삼촌은 담뱃불을 붙이며 길을 건너다가 빙판에 속력을 못 이겨 미끄러진 차에 받혀 쓰러졌고 머리를 다쳐 병원에 누워있게 되었다.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지금까지도. 무서웠다. 내가 한 말들 때문에 삼촌이 그렇게 된 것 같아서. 그 때 이후로 ‘담배’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물건이 되었다.


친구는 자신이 직접 조향한 샘플을 묻힌 테스트지를 건냈다. ‘어? 이건 뭐지? 내가 표현하고 싶은 추억의 느낌이었다.


“나한테는 좋은 향 나쁜 향은 없어. 그냥 향이 있을 뿐이지. 향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선택해서 원하는 향기를 만드느냐가 조향사가 하는 일이거든. 그리고 사실 향수에 쓰는 담배향은 담배연기냄새는 아니야. 말린 잎담배 냄새, 풀냄새거든.”

향수를 만들어가지고 온 날. 나는 삼촌이 세 들어 살던 방문을 열어보았다. 지금은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지 않은 창고방이 되었지만. 주섭삼촌이 쓰던 노트들은 모두 시골로 보내버린 줄 알았는데 아버지 서재에서 미처 보내지 못한 한 권이 남아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일기도 소설도 편지도 아닌 시를 쓰고 있었던 삼촌. 소박하고 담백하여 아름다운 시편들이 남루한 모습의 삼촌이 쓴 거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삼촌의 내면에 이런 세계가 있었던 걸까? 이게 원래 삼촌의 모습이었을까? 내가 미워했던 담배냄새가 원래는 이토록 좋은 향기였던 것처럼.

담배냄새를 멀리하면 기억에서도 나의 죄책감에서도 멀어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한 꺼풀의 두꺼운 외투를 벗은 것처럼 후련하면서도... 아직은 춥다. 아픔으로 남은 기억조차도, 자랑스럽든 부끄럽든 지나온 것은 전부 내 모습이다.. 어쩌면 그 때의 철없던 나를 여태껏 미워하며 벌을 받고 있던 걸까. 노스텔지어를 만들면서 나는 향수 뿐 아니라 나의 기억을 조향할 수 있었다. 함께 어우러졌을 때 한층 풍부하고 깊은 향기가 완성된 것처럼 희극과 비극이 함께 있는 그 모두가 어우러진 지금의 내가 소중한 거라고.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갔던 재래시장이 생각난다. 그곳에 기거하는 온갖 삶의 냄새. 생선 젓갈의 비릿하고 짠 바다 내음, 그 맞은 편의 푸릇푸릇한 푸성귀며 과일냄새, 떡방앗간에서 진동하던 진한 참기름향, 진열대 위 새 신발의 빳빳한 고무냄새,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뜨끈한 순대와 부침개 냄새...생은 향취나 악취가 아닌 동등한 무게로 나의 오감에 육박했고 지금도 그 맛과 빛과 소리를 영화 속 필름처럼 돌려볼 수 있다. 날것들이 출처를 숨기지 않는 적나라함으로 말하던 것,'모두가 애초에 이러하단다.'

자연스러움으로 혹은 무구함으로 그들이 여전히 내 발길이 닿는 지척에 활기를 간직한 채 숨쉬고 있다는 게 문득 위로가 되는 오늘이다.


창문을 열자 골목 저편에서 막 담배를 피워 문 남자가 걸어온다, 그 시절의 삼촌 또래로 보이는. 의식적으로 숨을 참고 창문을 닫는다. 그래도 희미하게 매캐한 연기가 감도는 공기. 휴우, 숨을 내뱉으며 생각한다. 담배연기는 여전히 못 참겠고 매스껍지만 적어도 저 사람이 미운 마음이 없다. 예전의 나라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담배 피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슴없이 비난할 수도 있을 텐데. 더 이상 내 안에 혐오감이 올라오지 않는다. 담배는 그저 향이다. 그걸로 된 것이다. 내 안에서 저 ‘담배냄새’와 같은 것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 카레라이스나 액션영화처럼 사소한 취향부터 직장 동료와의 인간관계, 사회적 이슈에 이르기까지 난 좋고 싫은 게 참 분명한 편이다. 하지만 단지 내가 정한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싫다고 단정지어버리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 때문에 그 내용이나 사연을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밀쳐냈던 많은 것들, 떠나보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가 ... 꼭 그래야만 했을까? 돌아보게 된다. 사실은 그저 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내가 보고자하는 면만을 보고 느끼고자 하는 쪽으로만 느꼈을지도 모르는데. 틀렸다고 말하는 자신이 틀린 줄을 모른 채로. ‘틀리다’를 ‘다르다’로 바꾸고 나자 마음이 열리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이 떠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십년 만에 삼촌을 다시 만났듯이, 내가 잃어버린 많은 것들과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